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일본에서 건축을 배운 르 꼬르뷔지에의 제자의 작품이 제주에!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의 제주에서의 발자취
2022/3/4
‘제주와 일본의 깊은 인연’은 2020년 4월부터 2022년 7월까지, 2년 4개월 동안 제주에서 근무한 이세끼 요시야스 전 총영사가 제주의 다양한 장소와 많은 분들을 직접 만나며, 제주도민 여러분의 도움으로 연재 기사로 정리한 것입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제주와 일본의 깊은 관계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제주와 일본의 깊은 인연’의 기사 내용은 연재 당시의 것으로, 일부 내용은 현재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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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안도 타다오(安藤忠雄) 씨나 故 이타미 준(伊丹潤) 씨에 의한 제주의 ‘풍토건축’작품 등을 방문하며, 제주를 통해 한국 건축계에 불어온 일본 문화의 바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또한 일본인 건축가에 의한 기존 건축물 리모델링, 그리고 일본과 인연이 있는 제주의 건축물 리모델링에 대해서도 소개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주 현대 건축의 일본과의 인연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니, 일본에서 건축을 공부한 후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故 김중업 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김중업 씨 스스로도 대표작 중 하나로 꼽은 ‘제주대학교 구 본관’을 비롯한 건축작품을 제주에 남겼습니다. 이세끼 요시야스 총영사는 김중업 씨와 인연이 깊은 제주대학교의 건축학부 교수로 교토(京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용규 교수님께 이번에도 안내를 받으며, 김중업 씨와 일본과의 인연을 돌아보며 김중업 씨가 제주에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건축가 김중업 씨는~일본인 은사들과의 만남으로 건축의 길로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중업 씨는 명문으로 알려진 평양고등보통학교에서 도쿄(東京)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 출신인 일본인 회화교사 니노미야(二宮) 선생으로부터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나 집안의 반응은 의사나 변호사가 되라는 것이어서, 미술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니노미야 선생의 충고로 건축의 길로 나가기로 해서, 1938년 현재도 그 당시에도 건축 명문으로 알려져, 다수의 건축가를 배출해 온 요코하마(横浜)고등공업학교(현 요코하마국립대학) 건축과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同고등공업학교에서는 건축과 창설 당시부터 초대 주임 교수를 맡은 나카무라 쥰페이(中村順平) 교수의 지도를 받습니다. 나카무라 교수는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 건축과에 유학·수료(1921~1923년)한 몇 안되는 일본인 건축가이기도 해서 데생을 지극히 중시. “뛰어난 데생 화가가 아닌 한, 건축사로서 대성할 가망이 없다” “건축은 예술이다”라는 건축관으로, 同고등공업학교 건축과의 입학 시험도 데생의 비중이 지극히 높았다고 합니다. 김중업 씨가 同고등공업학교에 진학하게 된 이유로, 수학여행으로 방문한 항구도시·요코하마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는데, 니노미야 선생과 진로를 상담하면서, 에콜 데 보자르 출신의 나카무라 교수의 존재와 데생을 중시한다는 점에 주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김중업 씨 스스로 나카무라 교수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했었는데, 건축가로서 장래를 꿈꾸는데 있어 은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김중업 씨가 同고등공업학교 재학 중에 결혼한 부인은 당시 자택에 훗날 그 밑에서 일하게 될 르 코르비쥐에의 사진이 장식되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실은 나카무라 교수야말로 르 코르비쥐에를 일본의 건축계에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파리 유학 중이던 1922년에 르 코르비쥐에의 강연에 감명을 받고, 이를 1924년 건축계의 청년들의 건축운동을 적극적으로 다뤘던 잡지 「건축신쵸(建築新潮)」의 연재 「프랑스 현대도시 연구에 관하여」(仏蘭西現代都市研究に就いて)에서 다루었습니다.
김중업 씨는 同고등공업학교를 1941년에 졸업한 뒤, 같은 학교 선배인 사카모토 토시오(坂本俊男) 씨가 소속되어 있던 관계로, 현재의 마츠다히라타셋케이(松田平田設計) 설계사무소에서 근무. 이후 한국으로 귀국하여 1947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로 취임합니다. 1952년 7월, 한국전쟁 중임에도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주최 제1회 세계예술가대회에 한국 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르 코르비쥐에와 직접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연구소에서 근무(1952년 10월~1956년 3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귀국 후 건축가로 활약하게 되고 제주에서도 건축작품 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 1 : 잃어버린 걸작 ‘제주대학교 구 본관’

1956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김중업 씨는 당초 르 코르비쥐에의 초기 작품과 같은 합리적이고 기능주의를 내세운 작품을 탄생시켰지만, 훗날 제주대학교 구 본관과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주한프랑스대사관(1959년 설계, 1961년 준공)을 계기로 김중업 씨 자신이 해석한 한국 건축의 전통적인 곡선미, 한국적인 미를 부각시키게 되었습니다. ‘제주대학교 구 본관’(1964년 설계, 1970년 준공)은 이러한 독자적인 작풍을 더욱 내세웠다는 것으로 위치 매김 되어 있습니다.
완공된 건물은 아직 제주도 전지역으로 전기도 보급되지 않은 제주에 ‘21세기 건축’을 가져왔다는 파격적인 디자인. 김중업 씨 스스로 이상에 불타는 젊은 학도들을 위한 전당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탄생한 ‘쾌심(快心)의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강렬한 인상과 미래를 향한 희망을 안겨 주었을 것으로 쉽게 상상이 갑니다.
르 꼬르비쥐에는 기둥을 바닥의 바깥에서 약간 안쪽에 두어 구조적 역할을 집중시킴으로써 서양의 전통 건축에서 볼 수 있는 두꺼운 벽으로부터 건물을 해방시키는 것을 시도하고, 이를 전제로 한 ‘새로운 건축을 위한 5가지 요점’, 흔히 말하는 ‘근대 건축 5원칙’((1)필로티=벽 없이 기둥만으로 구성된 바람이 통하는 공간, (2)옥상 정원, (3)자유로운 평면 구성=자유로운 배치, (4)수평 연속 창, (5)자유로운 입면=자유로운 벽의 형태)을 주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제주대학교 구 본관’은 이 5원칙을 모두 충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단지 제자인 김중업 씨가 스승이 제창한 원칙을 충실히 담아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제주만의 독특한 의미도 담겨 있었습니다. 이용규 교수님에 따르면, 예를 들어 ‘(2)옥상 정원’을 덮은 역보의 곡면 지붕은 제주의 풍토에 맞춰 햇빛과 습기를 동시에 차단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함과 동시에, 당시에 제주의 일반적인 건축재로는 표현하기 어려웠던 것이 철근 콘크리트를 도입함으로써 비로소 실현되었다는 측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5)자유로운 입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교수 연구실이 위치할 3층 부분의 둥그스름한 구조, 거침없는 포치나 나선 경사로의 곡선, 김중업 씨의 작품의 하나의 특징인 독특한 형태의 기둥 등 곡면을 많이 사용한 외장은 역시 가공이 비교적 용이한 콘크리트가 있어야만 실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건축가인 김중업 씨가 이런 건축물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는 점도 당연히 있지만, 제주 측에서도 새로운 소재로 처음으로 가능하게 된 디자인을 꼭 받아들이고 싶은 측면도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울러 김중업 씨는 제주도의 풍토에 맞는 건물로 건축한다는 관점에서 외장의 일부와 화장실의 내장 등에 부분적으로 제주도의 현무암도 활용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용규 교수님은 ‘제주대학교 구 본관’이 김중업 씨의 대표작이 된 요인으로 개인적으로 강한 신뢰 관계를 가졌던 제주대학교 국립대학 승격 후의 초대 학장인 문종철 교수(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한 독일법 학자, 이용규 교수님에게는 교토대 선배기도 합니다), 즉 강한 리더십과 신뢰 관계를 가진 클라이언트로부터 직접 의뢰를 받아 만든 작품이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의 국립대학의 조달 등의 제도가 현재와 달리 융통성이 있었다는 점도 들었습니다. 예산 면에서 큰 어려움이 있어 준공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그럼에도 김중업 씨가 건축가로서 펼치고 싶었던 일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주 땅에 탄생한 김중업 씨의 걸작이었지만, 지금은 실물을 볼 수 없고, 제주에서도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모형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 건축계에서도 일어난 일이지만, 콘크리트에 바다 모래를 사용하여 그 염분에 의한 노후화가 매우 빨리 진행되었고, 게다가 잦은 내부 구조 변경 등으로 인해, 김중업 씨가 1988년 타계하기 전에는 이미 “나에게도 소중한 작품이어서 오늘에 이르러 쇠퇴해 가는 모습을 볼 때 무척이나 가슴 아프다”고 탄식할 정도였습니다. ‘제주대학교 구본관’은 결국 근대 건축물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처음이라고 여겨지는 보존 운동을 포함한 논의 끝에, 1995년에 철거되어 버리고 말았습디다. 제주 뿐만 아니라 한국 건축계에서는 보존되어 있었다면 틀림없이 문화재급으로 불리는 역작의 상실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 2 : ‘구 제주대학교 수산학부 본관’(현 서귀포중앙여자중학교)

이어서 이용규 교수님과 겨울방학 중의 서귀포중앙여자중학교를 찾았습니다. 서귀포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 학교의 건물은 원래 김중업 씨가 설계한 ‘구 제주대학교 수산학부 본관’(1965년 설계, 1970년 준공)이었던 건물입니다. 김중업 씨는 제주대학교에서 제주시내에 ‘제주대학교 본관’, 그리고 서귀포에 ‘농학부 본관’, ‘수산학부 본관’ 등을 설계했는데, 그 가운데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입니다.
용도 변경에 따른 증·개축 등으로 김중업 씨가 설계한 모습과는 상당히 변형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큰 특징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용규 교수님은 특히 크게 김중업 씨의 건축물다운 특징으로 아래 3가지에 대해 소개해 주셨습니다.
(1)중학교 건물용으로 창틀이 설치된 점은 변형되어 있지만, 수평 연속 창과 기둥과 함께 구조와는 관계없이 설치된 세로 수직적 라인이 인상적인 파사드.
(2)내부의 계단의 뒤편의 V자형 구조에 의해서, 기둥을 사용하지 않고 강도가 확보된 구조미.
(3)서쪽 창문에 설치된 르 코르비쥐에 건축의 특징의 하나이기도 한 돌출된 수직 루버. 서양을 막으면서 남쪽으로부터의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햇빛의 입사각 등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계산되어 있음.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 3(?) : ‘구 소라의 성’

이용규 교수님과 함께 방문한 또 하나의 장소는 서귀포시 해안가의 절벽 위에 서 있는 이채로운 건물 ‘구 소라의 성’(1969년 준공)입니다. 과거 ‘소라의 성’이란 식당과 사단법인 제주올레 사무국으로 사용된 후, 현재는 서귀포시가 북카페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실은 한국 건축계에서도 수수께끼의 건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건축 당시의 기록이 아예 남아 있지 않고, 누가 어떤 경위로 지었는지, 누가 설계했는지, 그 이전의 문제로 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지 등등,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 건축계에서는 곡면을 많이 사용한 대담한 디자인, 근대 건축의 5원칙의 충족 정도, 수준 높은 설계 기술, 아치 부분 등의 세부 마감의 탁월함, 다른 작품과의 유사성, 김중업 씨가 위에서 언급한 제주대학교 관련 건물 시공으로 제주에 머물던 시기의 건물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김중업 씨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고 있다고 합니다. 남쪽으로 바다를 전망하는 수려한 풍광을 간직한 땅에 자리잡은 이국적인 별장과 같은 분위기가 매력적인 건물입니다.
건축가 김중업의 제주에서의 작품은 ‘제주의 풍토건축’의 시작인가?
김중업 씨는 상술한 바와 같이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부터 점차 자신이 해석한 한국의 전통적인 곡선미, 한국적인 미를 강조한 독자적인 색깔을 드러냈고, 그것이 ‘제주대학교 구 본관’으로 꽃피우게 되었습니다. 김중업 씨는 조선시대의 왕궁 등에서 볼 수 있는 곡선과 가벼움을 특징이로 하는 한국의 전통 건축의 지붕에서, 유교 우위의 한국 문화 속에 깃들어 있는 샤머니즘의 전통을 찾아내,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구축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이에 관해 김중업 씨 본인은, 한국에서는 샤머니즘과 밀접하게 결합된 불교신도의 집에서 자란 것(논어나 맹자와 같은 유교 고전보다 장자나 노자와 같은 서적을 좋아했다고도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는 특히 어머니로부터 한국적인 정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 영향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카무라 교수의 영향이라는 요소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카무라 교수는 상술한 대로 “건축은 예술”이라며 상징성과 풍토·전통을 담은 메시지를 반드시 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교수로 그러한 교육을 실시했다고 합니다. 김중업 씨도 처음으로 건축을 배운 同고등공업학교에서 그런 감각이 길러진 것은 아마 틀림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김중업 씨의 제주에서의 작품은 ‘제주의 풍토건축’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요? 김중업 씨가 ‘한국의 풍토’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고, 제주의 현무암을 부분적으로 사용하거나 제주 풍경과의 조화를 모색하는 등 제주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도 분명한데, 그것이 ‘제주의 풍토건축’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샤머니즘의 전통이 가장 짙게 남아 있는 제주는 김중업 씨 본인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별개로, 한국의 다른 지방과 비교했을 때 김중업 씨가 지향한 방향성에 맞는 땅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대표작 중 하나가 세워졌다는 것은 나중에 돌이켜보면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중업 씨는 ‘제주의 풍토건축’에 있어 적어도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주는 훗날의 보다 본격적인 ‘제주의 풍토건축’, 故 이타미 준 씨와 안도 타다오 씨의 작품이 도래하기를 기다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방문 관련사진

(사진제공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대학교 현 본관은 지금은 제주시 한라산 측으로 이전되었지만, 김중업 씨의 구 본관은 제주시내 용담동 바다 인근에, 지금은 제주대학교 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체육관이 자리잡은 곳에 있었습니다. 바다와 한라산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입지로, 이곳에 건물이 보존되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자주 듣습니다.

(사진제공 : 요코하마고속철도주식회사(横浜高速鉄道株式会社))
△김중업 씨의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 시절의 은사 나카무라 준페이 교수는 건축교육에 열의를 쏟은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품으로서는 항구도시·요코하마의 건축과 교수답게 대형 여객선의 선내 장식을 많이 했고, 에꼴 데 보자르에서 수학한 경력도 있어서인지, 부조와 같은 장식물이 알려져 있습니다. 사진은 요코하마은행 본점 벽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져, 현재는 요코하마고속철도 미나토미라이(みなとみらい)선 바샤미치(馬車道)역 구내에 장식되어 있는 부조 작품입니다.

(사진제공 : 국립서양미술관(国立西洋美術館))
△르 코르비쥐에의 작품은 일본에도 존재합니다. 도쿄·우에노(上野)의 국립서양미술관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모더니즘 운동에 관한 탁월한 기여-」의 구성 자산의 하나로, 프랑스나 출신국 스위스 등 다른 6개국의 작품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르 코르비쥐에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축가를 찾는 것은 어려울 정도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일본의 현대 건축은 세계적으로도 르 코르비쥐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온 것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국립서양미술관 건립에 있어서, 르 코르비쥐에에 의한 개략적인 도면을 구체화하기 위해 분주했던 일본에서 르 코르비쥐에의 ‘3대 제자’라고 불리는 사카쿠라 쥰조(坂倉準三)·마에카와 쿠니오(前川國男)·요시자카 타카마사(吉阪隆正) 3명의 건축가가 모두 일본건축가협회나 일본건축학회의 회장을 역임한 것에도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또 일본의 현대 건축이 르 코르비쥐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요인으로, 일본의 전통 건축이 기둥과 보로 이루어진 건축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르 코르비쥐에의 건축과 공통성이 있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점은 실은 한국의 전통 건축도 마찬가지. 그래서 김중업 씨와 같은 건축가가 배출되었을지도 모르고, 또한 김중업 씨가 박공 부분에 관해서는 예외가 있지만, 직선을 기조로 한 것이 많은 일본의 전통 건축의 지붕과 다른 전체적으로 유연한 곡선을 특징으로 한 한국 전통 건축의 지붕에 주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진제공 : ARCH-WALK HIROSHIMA(좌), 내각홍보실(内閣広報室)(우))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故 단게 켄조(丹下健三) 씨도 르 코르비쥐에를 동경해 건축에 입문한 인물입니다. 한국에서는 김중업 씨와 함께 한국 근대 건축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故 김수근 씨에게 큰 영향을 준 건축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다수의 유명한 건축물을 남겼는데, ‘국립요요기(代々木)경기장’, ‘가가와현(香川県) 청사 본관 및 동관’과 함께, 일본에서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히로시마(広島) 평화기념자료관’. 히로시마는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에 의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는데, 단게 씨에게도 구제(舊制)히로시마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추억의 땅이었습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도 필로티나 노출 콘크리트 등 언뜻 보기에 르 코르비쥐에의 강한 영향을 느낄 수 있는 건축인데, 단게 씨는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을 설계함에 있어 필로티로부터 정면에 원폭 돔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 축 위에 위령비를 배치. 그것이 위령과 평화를 기원하는 장소로서의 상징성을 극적으로 높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또 하나, ‘세계 평화의 섬’ 제주특별자치도는 히로시마 시장이 의장을 맡는 ‘평화 수장 회의’에 참가해 오고 있습니다.

△안도 타다오 씨도 르 코르비쥐에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세계적인 건축가 중 하나입니다. 젊은 시절 르 코르비쥐에의 작품집을 접해 충격을 받고, 만나고 싶어서 시베리아 철도로 파리까지 갔지만, 르 코르비쥐에가 타계한 지 몇 달 후여서 결국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건축에 종사하시는 분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제주 건축계의 여러분은 르 꼬르비쥐에의 흔적이 제주에 김중업 씨와 안도 타다오 씨라는 두 건축가의 작품을 통해 남아 있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사진은 이용규 교수님의 안도 타다오 씨의 ‘글라스하우스’ 데생입니다.

△김중업 씨의 건축물은 콘크리트의 형태적 가능성을 널리 재확인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에 앞서 1960년대 초 돌과 나무가 건축의 주재료로 사용되었던 제주에 처음으로 콘크리트를 사용해 아치형 구조체를 만든 건축이 ‘테쉬폰식 주택’. 목장을 조성하여 목축업 등을 통한 제주의 경제발전을 도모한 아일랜드 출신의 신부가 개척농가를 위한 주택으로 보급한 구법(構法)으로, 이용규 교수님을 포함한 여러분의 노력으로 한국의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구법에 대해서는 그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일랜드에서 다시 이라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재료에 관해서는 양질의 제품이라는 이유로 일본의 아사노(浅野) 시멘트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바다를 건너온 여러 요소들을 서로 연결시켜 만들어 냈다는 섬사회인 제주다운 문화유산인 동시에 그 뒤를 잇는 김중업 씨의 작품까지 제주의 건축 소재 보급, 그리고 건축 기술 향상에 있어 큰 기여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김중업 씨는 한국의 대표적 현대화가인 故 이중섭 화가와도 한국전쟁 중 피난처인 부산에서 만났습니다. 이중섭 화가가 행복했던 제주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씨와 두 아들이 일본으로 돌아간 직후입니다. 같은 한반도 북부 출신, 그리고 같은 일본 유학 경험자라는 동료 의식도 있었던 것 같은데, 힘든 생활이었지만 가족과 함께였던 김중업 씨는 이중섭 화가가 가족과 재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러 어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애를 써서 도쿄의 야마모토 마사코 씨와 3분 간만 국제전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선했던 것을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중섭 화가는 3분 동안 수화기를 움켜쥐고, ‘모시모시’라는 말만 하고서는 그저 눈물만 흘릴 뿐. 통화가 끝난 뒤에는 둘이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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