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주의 높은 교육수준에 한 번, 그 이유를 듣고 또 한 번 놀랐습니다.

2021/1/20


 한국의 대학입시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은 일본에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1980년대 초반 제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분으로부터, “우리 고등학교 동창 중에서 서울대에 50명 이상이 합격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서울 강남의 입시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서울대 진학이 사실상 어렵다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는, 인구가 70만도 안 되는 (당시는 더 적었지만) 제주에서, 다른 고등학교까지 합쳐 100명 이상이 서울대로 진학한 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차이는 차치하고 대략 비교한다면, 예를 들어 일본에서 인구 70만에 못 미친 현(県)에서 100명이 넘는 도쿄대·교토대(東京大·京都大) 합격자를 배출했다고 생각해도, 상당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198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제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그 당시 대학입학 학력고사(현재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전국수석’으로 통과하여, 당연하게 서울대도 수석으로 입학한 것이, 당시 한국에서는 외딴 섬 제주에 이런 수재가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그 요인을 제주의 여러분께 여쭤보면, 가장 먼저 나오는 대답이 바로 '유배'입니다. 조선시대 제주는 ‘유배지’로, 머리는 뛰어나지만 권력다툼에서 패한  관료들의 피가 섞여 있으니, 그 후손도 공부를 잘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주의 여러분으로부터 또 다른 한 가지 요인도 듣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과의 관계'입니다. 처음에는 들었을 때에는 ‘뭐지? 정말인가요?’라고 생각했지만, 설명을 들어보니 내용은 이러합니다.



 첫째, 제주와 일본 오사카(大阪) 사이에는 직항선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1923년 경부터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직항선이 개설되었는데, 제주의 여러분으로부터 “우리 할아버지(또는 친척 아무개)가 직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을 나왔다”, “당시 제주에서는 서울이 아니라 더 발전된 교육을 받으러 배를 타고 오사카로 건너갔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주 4·3기념관’을 방문했을 때에도, 1947년 당시, 북제주군(현재의 제주시)의 초등학교 진학률이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는 전시가 있었고, “오사카와의 직항선이 있어서 사람도 왕래하고 여러 문물도 들어왔기 때문에 교육수준이 높았다”라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둘째, 감귤농업을 바탕으로 한 경제력입니다. 서귀포에 있는 감귤박물관에서, 제주의 감귤농업이 일본과의 관계로 발전해 왔다는 점과 여성의 사회 진출에도 기여했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한국에서 감귤은 경제적으로 매우 매력적인 작물로, 감귤 한 그루로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다는 의미로 ‘대학나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제주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총영사관이 주최한 「고교생 일본어 말하기 대회」의 높은 수준으로부터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껏 순조롭게 온 것은 아닙니다.
 우선 해방 이후 제주의 역사는 제주 4·3사건의 어려움을 이겨낸 역사로, 많은 아이들이 공부만 하고 있을 수 있는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첫머리의 1980년대 제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신 분은 제주도 중산간 지역 출신인데, “우리 마을은 1970년대 초반 재일제주인의 기부로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전기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처음 집에 전기가 들어왔을 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라는 이야기도 전해 주셨습니다. 제주 전역에 세워진 재일제주인의 ‘공덕비’를 봐도, 제주의 많은 지역이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도 방방곡곡 전기가 들어오게 된 것은 의외로 멀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지만, 제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제주의 많은 분들이 어려움과 불편함을 이겨내고, 열심히 공부하여, 제주의 발전에 기여해 온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